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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책] 비행운_김애란읽기 2017. 6. 1. 20:19
그때 나는 너무 많은 사람, 몹시 나쁜 공기, 엄청 많은 상품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. 물론 교정의 초목과 잘 식은 봄밤 공기는 가슴을 떨리게 하기 충분했다. 지금도 나는 나무가 뿜어내는 '피톤치드'라는 식물의 방어 물질에 사랑의 묘약이 섞여 있다고 믿는 편이다. 그렇지 않고서야 신학기 그 많은 청춘이 그렇게 동시에 상기된 채 헤롱댈 수는 없는 일이다. 번식기의 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는 은근하며 서툴렀고 노골적인 동시에 싱싱했다. 나는 스무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.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,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.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,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,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 주길 바랐다. 환영식 날, 잔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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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책] 아몬드_손원평읽기 2017. 4. 9. 17:07
심 박사를 찾아간 어느 날이었다.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다.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관한 뉴스다. 화면을 보고 있는 심 박사의 얼굴은 무표정하다.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. 나를 보자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. 내 시선은 미소 띤 박사의 얼굴 뒤로 떠오른 소년에게 향해 있었다. 나 같은 천치도 안다.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.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. 하지만 묻지 않았다. 왜 웃고 있느냐고.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,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. 비슷한 모습을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. 채널을 무심히 돌리던 엄마나 할멈도 마찬가지였다.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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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책] 가시고백_김려령읽기 2017. 4. 3. 17:08
akseli gallen-kallela 『우아한 거짓말』을 읽고 반해 김려령 작가의 책을 찾아 읽은 게 이걸로 네 번째. 앞서 읽은 세 권의 책을 삭 덮어버리지만 또 함께 더불어 상기하게도 하는 따뜻한 작품이다. 나는 청소년 분야 도서 편집자다. 패기는 사라진 나이이지만 아직 경험치는 턱없이 모자라고, 직업에 소명 의식을 갖지도 못했다. 이런 상태에서 그간 나는 아주 몇 안 되는 청소년들을 만나 보고, 나의 독자들을 가벼이 여겼다. 또 아주 몇 안 되는 작품을 읽어 보고는 청소년 문학이란 적당히 유치하고 어설프지만 희망찬 메시지 하나 적당히 전해 주면 되는 글인가? 의심했고, 무시했고 스스로 포기해 왔다. 내가 일하고 있는 분야가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, 커질 수 있는지를 오랜 시간 고민하지 않았다. 이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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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책] 82년생 김지영_조남주읽기 2017. 3. 29. 11:43
Head of a young girl(Rose Grimsdale), George Clausen 큰 외삼촌은 지역의 국립 의대를 나와 모교 대학 병원에서 평생 일했고, 작은 외삼촌은 경찰서장으로 은퇴했다. 어머니는 오빠들이 성실하고 반듯하고 공부를 잘하는 게 뿌듯하고 보람 있었다. 공장의 친구들에게도 자랑을 많이 했는데, 그 자랑스러운 오빠들이 경제력을 갖게 되자 막내 외삼촌을 뒷바라지했다. 덕분에 막내 외삼촌은 서울에 있는 사범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, 큰 외삼촌은 집안을 일으키고 가족을 부양한 책임감 있는 장남이라고 칭찬받았다. 그제야 어머니와 이모는 사랑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는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. 두 사람은 뒤늦게 산업체 부설 학교에 다니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..